닫힌 성경 열기
교회의 터는 사도적 복음이다. 신약 성경 전체 내용이다. 교회다움은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직결되어 있다.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다움에서 멀어지고 신자다움과도 동떨어진다. 많은 교회가 이미 수용하는 있는 관점이나 교리의 틀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바른 해석을 회피하고 있다. 그 관점, 틀 안에서 닫혀 있다. 바뀌어야 한다.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을 바르게 해석하여야 한다. 성경을 여는 것이다. 이는 중세와 같이 타락하였다는 한국의 개신교회가 개혁되고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기 위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중세 때의 닫힌 성경을 여는 것으로 종교 개혁이 이루어졌던 것과 같다. 성경을 열고 교회를 개혁하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여야 한다.
물질적 부유함
구약 시대에는 물질적 부유함이 복의 한 내용이었다. 하나님은 물질적 부유함을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며 말씀을 지키도록 하는 방편으로 활용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분은 구약의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 신자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말씀을 지키게 됨에 있어서 그분으로 충분하다. 신약 성경에서 물질적 부유함의 근거로 제시되는 내용들은 모두 본문을 잘못 해석한 결과이다.
물질적 부유함은 구약 시대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러한 역할을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림자(물질적 부유함)가 아니라 실체(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효력을 가진다. 물질적 부유함이 구약 시대에서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인간적으로 좋게 여겨지는 바를 앞세워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처사이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다면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못된 해석을 따른다. 삼박자 축복, 오중복음으로 더 멋지게 포장하는 일에 힘을 쏟는다. 순복음 교단의 존속과 직결되는 양 생각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사람의 생각을 하나님과 그분의 뜻보다 더 앞세우고 있다. 영혼과 몸을 함께 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거나 매우 희박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상반되는 내용의 설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었습니다. 영원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따르지 않고 그렇게 살면 멸망당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노선이 다른 두 목사의 말이 아니라 한 목사의 설교 내용이다. 많은 장로교 목사들이 이렇게 설교하는데, 둘은 동시에 가능한 말이 아니다. 모순이다. 그런데 성경의 내용을 따라 설교한다면서 그렇게 설교하고 있다. 성경 자체가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물론 당사자들은 성경은 영감되었기에 모순이 없다고 고백한다. 설교 내용이 영감론을 부정하는 있는 상황인데,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의아해하는 성도들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냥 적응하고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성경적으로 개념을 정립하지 못하고 혼용하기 때문이다.
바른 분별을 통해 그러한 혼돈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동일한 단어이지만 문맥에 따라 의미에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 신자의 바른 관계에 대한 신앙생활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단어인 은혜, 구원, 믿음이 대표적이다.
은혜
성령 하나님은 비신자의 마음을 열어 복음에 청종하게 하신다. 은혜이다. 그 열매로 비신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고 신자가 된다. 은혜의 열매다. 그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그 은혜가 주어지는 당사자가 평생에 한번은 반드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은 신자 안에서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역사를 행하신다. 은혜이다. 신자는 그 역사를 따를 수도 있고 육체의 소욕을 따를 수도 있다. 전자는 은혜를 바르게 받은 것이고 후자는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이다. 가항력적인 은혜이다.
은혜의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고 그 결실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그 분별이 그렇게 어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잘되지 않고 있다. 은혜는 당연히 불가항력적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구원
비신자에게 베푼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열매를 맺어 복음을 청종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된다.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구원이다. 이 경우는 성경에서 대부분 과거형을 사용한다. 과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이 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 앞에는 죽음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다. 전 인격과 전 삶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와는 달리 미래의 하나님 나라이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구원이다. 성경에서 영원한 구원이라고도 표현되는데, 그 시점은 미래이다. 그래서 함께 사용되는 동사는 미래형으로 쓰인다.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누리는 것도 구원이다. 현재적 구원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한다. 회개를 통하여 그 관계가 회복된다. 지체들이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워 다투고 분열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훼손된다.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를 비우면 겸손하고 상대방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성령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게 된다. 현재적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믿음
비신자에게 주어진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결실을 맺어 복음을 청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다. 여기에는 사람 편에서의 행위가 없다. 행위를 내세울 것이라고는 없다. 이 믿음은 비신자가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여 그분의 자녀가 되는 조건이다. 관계 회복으로서의 구원에 있어서 조건이며 행위는 없다(엡 2:8-9, 딛 3:5).
신자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믿음이다. 성부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주님이 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각 시대에서 신자에게 원하시는 바를 바르게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순종이다. 여기에서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이다.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고백으로서 믿음이면서 동시에 순종이다. 이는 영원한 구원 곧 죽음 이후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것은 진실하고 신자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은 분명하지만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고 육체의 소욕을 따를 수 있다. 불순종이면서 불신앙이다. 배교, 사명을 저버림, 윤리적인 범죄의 지속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영원한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영원한 구원에 있어서 믿음이 조건인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순종이 조건인 것이다. 주 예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는 말씀(히 5:9)과 같다.
같은 원리의 적용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다른 여러 은덕들 곧 거듭남, 칭의, 거룩함, 영화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첫 믿음으로 거듭났다. 의롭다 함을 얻었다. 거룩해졌다. 영화롭게 되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히셨다는 바울 사도의 진술(엡 2:6)은 영화롭게 되었다는 말이다.
두 번째 믿음 다르게 말하면 순종으로 거듭난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엡 4:22-24). 의롭다 함을 얻는다. 로마서에서 다루는 주제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담아내기에 거룩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반영하기에 영화롭다.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난 이후에 완전한 천국 시민으로 거듭날 것이다. 불의와는 완전히 단절되고 영원토록 의로울 것이다. 완전하게 하나님의 속성을 누리는 존재로서 거룩해질 것이다. 온전히 주 예수님과 같이 되어 영화로울 것이다.
신학적 취사선택의 문제
너무나도 명백한 성경의 진술임에도 불구하고 교단에 따라 취사선택하여 거부한다. 바른 해석을 회피하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비신자에서 신자가 됨에 있어서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임을 거부한다. 신자에게서 은혜가 불가항력적이지 않다는 것을 앞세운다. 칼빈주의자들은 신자에게서 은혜가 가항력적임을 거부한다. 비신자 때에 주어지는 은혜가 불가항력이라는 사실을 앞세운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무조건적인 견인이 뒤따른다. 양자 모두 구별하여야 할 부분은 혼용한 결과이다.
암호 풀이?
칼빈주의자들은 견인에 있어서 본문과 앞뒤 문맥에 없는 내용을 본문 해석에 끼워 넣는다. 칼뱅의 이중선택사상- 일반적 선택이 있고 그 안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개인적 선택이 있다는 주장, 후자는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는 함-이 대표적이다. 성경 해석을 암호 풀이로 만들어 버린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를 받은 고린도교회는 이중선택사상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 서신에는 멸망에 대한 구절이 있다. 무조건적인 견인으로 이해하려면 이중선택사상을 대입시켜야 하는데, 고린도교회는 그에 대한 개념이 없다. 고린도전서에서도 그렇게 이해할 만한 내용은 없다. 고린도교회 입장에서는 이중선택사상을 넣어 이야기되는 무조건적 견인은 암호풀이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 방식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중선택사상은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의 결과이기도 하다.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 선 너’에 대해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두려워하라(롬 11:20)고 권면했다.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지 않고 넘어지면 엄위가 있기 때문이다. 문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찍으셔서 뿌리인 예수 그리스도와 단절되어 멸망당하는 것을 뜻한다. 믿지 않은 유대인들을 꺾은 것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성경 전체의 용례와 문맥에 의하면 ‘믿음으로 선 너’란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이 분명하다.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엄위에 해당되는 이들이 개인적 선택은 없었고 일반적 선택만 있었던 존재라면서 처음부터 진정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문맥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을 끼워 넣어 자신들이 수용하는 교리를 정당화한 것이다.
문맥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 하나님에 의해 꺾인 유대인들이 나온다. 멸망당한 사람들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이를 ‘믿음으로 선 너’ 중에서 하나님의 엄위로 꺾이는 이들과 연결시킨다. 일견 별 잘못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믿음에 대한 두 이해가 없어서 생기는 잘못이다. 하나님에 의해 꺾인 유대인들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 안에서 그분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런데 현재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은 것이다. 믿지 않은 것이다. 첫 번째의 믿음은 있었지만 두 번째의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러한 구별이 없이 생긴 잘못된 해석의 결과이다.
‘믿음으로 선 너’는 불가항력적인 은혜 안에서 첫 번째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은 진실하다. 하나님의 인자에 거한다면 두 번째 믿음도 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엄위로 꺾인다면 두 번째의 믿음이 없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첫 번째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두 번째 믿음은 그들의 구원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은 꺾인다. 그리스도인에게 첫 번째 믿음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두 번째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곧 신자에게 원하시는 바를 수용하는 것이다. 이는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엄위로 꺾일 것이다.
문맥 살피기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그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이 말씀은 무조건적인 견인의 절대적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표면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아니다. 문맥 때문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27절). 28절의 근거이다. 여기에서 동사는 모두 현재형이다. 현재적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그분을 따르는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두 번째 믿음에 해당된다. 그 믿음을 토대로 영생이 절대적으로 보장된다. 조건적인 견인이다. 무조건적인 견인의 근거로 제시되는 성경 본문은 모두 이와 같다. 바르게 해석하면 조건적 견인을 말씀하고 있다.
엡 2:8-9, 딛 3:5의 경우는 첫 번째 믿음과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견인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견인의 근거로 삼는 것은 문맥을 벗어난 잘못된 적용이다. 십자가의 한편 강도를 견인의 근거로 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건은 효력 있는 부르심에 관한 것이다. 영원한 구원과 관련하여서는 특수한 경우에 해당된다. 효력 있는 부르심과 동시에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고전 3:15, 5:5 등을 무조건적인 견인의 근거로 제시한다. 문자만 보면 무조건적인 견인을 말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문법과 단어를 바르게 이해하고 문맥을 정당하게 고려하면 조건적 견인을 말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지예정
성경은 예지예정을 말씀하고 있다(롬 8:29, 벧전 1:2).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를 근거로 조건적인 선택을 주장한다. 어떤 사람이 믿을 것을 미리 아시고 그를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예지를 믿을 것을 미리 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은 그러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지가 정말 그러한 의미인가이다. 본문에서 ‘안다’는 부부 간의 성적 결합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체험적인 앎이다. 사랑한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미리 안다는 것은 미리 사랑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그 사랑은 사람 편에서 사랑받을 만한 조건을 갖추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신 것이다. 당사자가 믿을 것이라는 조건은 없다. 그러한 조건은 본문에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내용을 끼워 넣은 것이다.
즉각적인 회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신자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한다.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한다. 영혼과 몸을 능히 멸하시는 그분을 두려워하여야 한다. 그분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엉터리로 전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돌이켜야 한다.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즉각적으로 돌이켜야 한다. 전통에 얽매이지도 말고 곧바로 돌이켜야 한다. 각자 자신들의 테두리 안에 안주하는 태도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야 한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없으면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사람의 부패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준다. 전적 부패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거나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결과이다. 사람 편에서 어떤 조건을 갖춘 결과가 아니다. 그렇지만 선택이 영원한 구원까지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선택되었기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부르심을 받지만 영원한 구원도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속죄는 선택된 사람으로 한정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을 넘어 온 세상까지 미친다. 독생자를 세상에게 주셨다. 다만 믿는 자가 멸망당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구원을 얻는다.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한다. 성경의 내용과 다른 교리를 앞세워 가르치는 모습에서 즉각적으로 돌이켜야 한다. 잘못된 전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전통에 매여 있는 누군가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말고 돌이켜야 한다. 성경대로 이해하고 가르치며 배워야 하는 것이다. 한 장로교 목사는 구원에 관한 이전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공적으로 성도들에게 잘못했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영혼과 몸을 함께 멸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두려워한다면 지극히 마땅한 바이다. 진정한 개혁주의자라고 하겠다.
개독교라는 오명
바울 사도는 무릇 경건하게 살면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씀했다. 사회적으로 개독교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개신교의 현실은 그 결과가 아니다. 의를 행함으로 받는 핍박이 아니라 의와 동떨어져 당하는 조롱이라고 보인다.
왜 그럴까? 성도들 대부분은 나름대로 바르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데도 말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을 회개하며 착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신앙인의 바른 삶으로 두 갈래 길이 이야기되고 있는데, 하나만 옳다고 하자. 그런데 그릇된 길을 옳은 길로 생각하고 따라가고 있다면 자연히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바른 길을 찾고 그 길로 함께 가면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긍정적인 변화
진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면 교회는 좋은 면으로 많이 변할 것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데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가장 근원적인 토대를 굳건하게 세우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친근히 함과 그분을 두려워함이 균형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론이 성경적으로 바르게 한가지로 확정된다면 전 세계의 교회가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이후의 교회 역사에도 매우 긍정적인 공헌을 하게 될 것이다. 특히 지금과 같이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전기가 될 것이다. 교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똑같은 구원론이 전파된다. 하나님을 친근히 여기면서 두려워하도록 섬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지고 선한 일 곧 순종하는 삶에도 온전해지게 된다.
바른 해석에서 벗어난 현실을 직시하자. 바른 해석을 회피하는 현실도 직시하자. 베뢰아 교회와 같이 “그러한가”라는 자세로 성경을 연구하고 바르게 해석하여 전하도록 하자. 말씀사역자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 우리에게 성경은 열려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다함께 깨어 힘을 쏟아야 한다. 본문에 대한 바른 이해와 현대적인 적용이 이루어지고 그 위에 인격과 삶을 세워가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 안에 거하면서 그 영광을 세상에 보여주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도록 할 것이다. 구원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놀라운 일인가!
구원의 영광을 회복하자
이 모두를 <닫힌 성경 열기>(박창진 지음, 도서출판 등과 빛)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책에서는 양자의 주장을 함께 살피고 제시된 성경적 근거들을 바른 해석 원리로 재해석하였다. 성경이 하나의 신학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 않음을 증명하였다. 그 사실을 명쾌하게 밝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진술하였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다. 잘못된 것이 바른 부분을 침식하고 잘못된 모습이 강화된다는 뜻이다. 옳은 부분과 잘못된 부분이 공존하는 구원론의 경우에 잘못된 부분으로 인해 옳은 부분의 역동성이 약화된다. 이런 면에서도 바른 구원론 정립이 중요하다. 교리는 뼈대와 같아서 온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르게 세워가지 못한다. 현실 교회에서 확인되는 바이다. 그렇기에 바른 교리 확립에 목을 매달다시피 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 성경에 대한 바르고 깊은 이해에 통찰력을 제공받을 것이다. 어떤 주의에 사로잡히지 않고 성경대로 성경을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경건 서적과는 다른 맛을 경험하게 된다. 동시에 경건한 삶으로 나아가는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바뀌어야 한다.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을 바르게 해석하여야 한다. 이는 중세 암흑기의 교회와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되는 한국교회 개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중세 때의 종교개혁도 성경을 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도 성경을 열어 교회를 개혁하고 그것을 토대로 소금과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삶을 바르게 찾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 바른 이론을 굳건하게 정립하고 그 위에 아름다운 실천의 집을 세워야 한다. 구원의 역동성을 현실에서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길이다. 중세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닫혀 있는 성경을 열어야 한다. 한 말씀을 드러내고 그 위에 한 교회를 세우며 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말씀사역자라면 꼭 읽고 바른 말씀봉사로 온전하게 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진리의 말씀 위에 교회와 자신을 굳건하게 세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과 같이 교회적으로 구입하여 읽고 토론하면 별 어려움이 없이 성경적인 구원론을 정립하게 될 것이다. 바른 신앙생활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서로 격려하며 실천하게 된다면 하나님께 최상의 기쁨이 될 것이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지고 모든 선한 일에 온전해지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바른 지식을 토대로 믿음으로 생활하여 구원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영광을 누리는 삶으로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지체들을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