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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연혁

한국신약학회는 1961년에 시작되었다. 한국에 본격적인 신약성서학이 도입된 것은 이미 해방 이전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학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 거의 50여년일 뿐, 한국 신약학의 역사는 훨씬 더 오래되었다. 서술의 편의상, 지난 40년의 역사를 3기로 나누어 서술하려 한다. 이 구분은 회의록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필자가 임의로 나눈 것이므로, 얼마든지 이견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힌다.

"기초를 놓고 토대를 다지다": 제 1 기(1961-1975)

한국 신약학회 창립 총회는 1961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에 '백조 그릴'에서 있었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전경연(한신대), 지동식(연세대), 박창환(장신대), 유동식(연세대), 유시욱, 구두인(성 미가엘 신학교), 김용옥(감신대), 문상희(연세대), 이여진(한신대), 이상호(연세대), 김철손(감신대)로서 총 11명이었다. 실로, 한국의 신약학의 기초를 세운 분들이 주축이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임의 사회는 전경연 박사가 맡았고,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유동식 박사가 서기로 선출되었고, 이상호 박사가 회계로 선출되었다. 학회의 공식 명칭도 이 때 결정되어, <한국신약학회> (The New Testament Society of Korea)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모임에서는 학회의 목적을 정하여 회의록에 기록해 두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회는 한국에 있어서 신약성서학의 분야의 철저한 연구를 조장하여 한국교회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렇게 하여 출발한 신약학회는 같은 해 6월 26일에 제 2차 모임을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갖고, 회칙을 통과시켰다. 이 회칙은 이여진 목사와 몇몇 위원들이 작성한 것으로서, 현재 회칙의 기초가 되었다. 그 역사적 가치를 감안하여 여기에 소개한다:

한국신약학회 회칙

  • 1. 본회는 한국신약학회(The New Testament Society of Korea)라 칭한다.
  • 2. 본회는 한국에 있어서 신약성서학의 모든 분야에 철저한 연구를 조장하여 한국 교회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3. 본회의 사업은 다음과 같다.
    • ㄱ. 연구지 발행
    • ㄴ. 연구발표회 개최
  • 4. 본회의 회원 자격은 신약을 전공하는 자로서 본회원 2인 이상의 추천을 받아 총회원 과반수의 표를 얻은 자로 한다.
  • 5. 본회는 년 일차의 정기 총회와 필요에 응한 임시 총회를 가지며 회장이 이를 소집한다.
  • 6. 본회의 임원은 정기 총회에서 선거하고 그 임기는 1년으로 한다.
  • 7. 본회의 임원과 부서는 다음과 같다.
    • ㄱ. 임원 회장 1인, 서기 1인, 회계 1인
    • ㄴ. 부서 연구부(장 1인) 출판부(장 1인)
  • 8. 회비는 매 집회시 필요한 액수를 징수한다.
  • 9. 본회의 규칙은 총회 출석 회원 2/3 이상의 결의를 얻어 개정할 수 있다.

앞으로의 한국 신약학회의 발전과 결실을 전망해 볼 때, 이 때 놓여진 초석의 의미는 실로 과소평가할 수 없다. 현재의 회칙은 그 이후에 여러 차례 수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같은 날에 제 1회 연구발표회를 개최하였다. 발표자는 구두인 박사였고, 제목은 "바울의 의(義)"였다. 그 이후의 신약학회 연구 발표회의 내용은 부록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이 시기에 신약학회는 최근의 학회 활동보다도 더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매번 모일 때마다 모이는 회원의 수는 10명 내외였고, 모임도 대개 회원의 집 응접실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에는 매년 3회 혹은 4회의 모임을 가졌고, 모일 때마다 한 사람씩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하였다. 특히, 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학자들에게 연구한 것을 발표하도록 장(場)을 제공해 주었다. 모인 회원들의 태도 역시 매우 진지했다고 한다. 물론, 학회를 마치고 나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교제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지만, 독창적인 연구를 하기 위해서 회원들이 매우 힘써 노력했다.

매우 의미있는 프로젝트가 제안되고 추진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1965년에 James Robinson 교수를 초청하여 학술 강연회를 여는 문제를 논의한 바 있고, 이어서 Eduard Schweizer 교수와 Hay 교수 등에 대한 초청 강연도 실시되었다. 또한 신약학에 관한 문헌 목록을 정리하기로 하고, 국내 학자들의 논문과 저서와 역서를 모두 정리한 바가 있다(1966).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이루어진 가장 의미있는 프로젝트는 신약학 교재 편찬과 성서 주석 편찬이었다. 1973년에 제안된 이 프로젝트는 결국 <신약성서신학>(기독교서회)으로 빛을 보았는데, 참여한 학자들은 전경연(편집 책임, 바울 신학), 문상희(복음서), 이상호(원시 기독교), 박창환(요한신학), 김철손(일반서신과 계시록)이었다. 이 책의 초판은 40회 가까이 중판되었고, 개정 신판이 지금도 지속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또한 1975년에 신약 전권에 대한 주석을 편찬하기로 결의하였다. 처음에는 외국의 좋은 주석을 번역하기로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었다. 번역을 하느니 저술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강했지만, 그럴 경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이라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저술을 하기로 하고, 대한기독교 서회에서는 이 주석을 '선교 70주년 기념 주석'으로 출판을 하였다.

이렇듯, 신약학회의 처음 10여년의 역사는 한국 신약학이 기초를 든든히 다지고 그 줄기를 힘차게 뻗어가는 기간이었다. 이 시기에 활약한 회원들은 모두 영어와 독일어권에서 최고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학자들로서 척박한 한국 땅에 신약학이라는 나무를 이식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재 도약을 위해 준비하다": 제 2 기(1976-1994)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던 신약학회는 1976년 이후부터 약 10년 가까이 현저하게 침체 상태에 빠진다. 이 시기의 신약학회 회의록을 보면, 1976, 1980, 1981, 1984년의 학회 기록이 없다. 뿐만 아니라, 국내 학자들의 연구 발표는 별로 없었고, 주로 외국인 학자가 방문했을 때 함께 모이는 정도로 그쳤다. 이 시기에 신약학회와 만남을 가졌던 외국의 신학자들은 Otto W. Betz, William R. Farmer, Ernest Best, G. Strecker, Bruce Metzger, James Charlesworth 등이다. 신약학회 회원들은 이들이 한국을 방문해 있는 동안에 연락하여 급히 공개 강좌를 하고 모임을 가지곤 했다.

더구나, 이 때 이미 기독교 학회가 발족하였고 신약학회는 그 안에서 하나의 지학회(枝學會)로서 활동하였다. 따라서 신약학회가 따로 모여서 활동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결국, 기독교 학회의 발전이 실제적으로는 신약학회의 활동성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대 학회장을 지낸 전경연 박사는 이 시기에 학회 활동이 저조했던 또 하나의 이유를 증언해 주었다. 초기부터 활동했던 주요 회원들이 이 시기에 각 학교에서 학장 혹은 총장 등의 중요한 임무를 떠맡게 되었던 반면, 신진학자의 충원이 적었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소장 학자들 층이 두터워야 학회가 활성화되는 법인데, 그러한 소장 신학자들이 적었다. 이와 함께, 대부분의 신학교들이 급성장을 하면서 학교 내적인 업무들이 폭증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60년대와 같은 그러한 여유가 없어졌고, 따라서 년 1회의 모임도 쉽지 않은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 시기에 학회 자체의 활동은 저조했지만, 신약학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역량있는 소장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유학길에 올랐고, 기존 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점점 더 무르익어 갔다.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중요한 신약학 교재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저술되거나 번역되었다. 교회가 급성장을 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따라서 신약학은 이 기간 동안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 제각기 역량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도약의 날개짓을 하다": 제 3 기(1995-2004)
이러한 분위기는 9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갑자기 전환되었다. 그러한 전환의 가장 큰 이유는 신진학자들이 대거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였다는 점이다. 유성 호텔의 방 하나를 빌려서 모였던 학회가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을만큼 급속하게 회원수가 불어났다.

회원의 수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신진학자들의 연구 의욕과 학문적 교류에 대한 욕구가 강해졌다. 따라서 기독교 학회 시에 한 사람이 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것으로는 그 욕구를 전혀 소화할 수 없게 되었다. 1995년에 처음으로 "춘계 학술 발표회"가 따로 마련된 것이나, 1998년부터 기독교 공동학회가 열리는 때에 맞추어 "신진학자 논문 발표회"를 시작한 것은 이러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로 기독교 공동학회보다 춘계 학술 발표회가 더 큰 관심을 끌게 되었고, 현재는 150여명이 넘는 회원들이 참여하여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2001년에 새로 들어선 회장단에서는 월례 학술 발표회를 구상하고 실시할 것을 검토하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는 모두 신약학회의 급속한 성장을 증명해 준다.

전문 학술지 <신약논단>이 발행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그 이전에도 논단 발행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있었지만, 회원의 수적 제한 때문에 이룰 수 없는 꿈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1995년에 첫 발을 내딛은 <신약논단>은 년 1회 발행으로 진행하다가, 2000년부터는 년 2회로 발행하였다. 2001년 회장단에서는 년 4회 발행할 것을 결정하고 진행하고 있으니, 최근의 신약학회의 성장 속도가 얼마나 신속한지를 알 수 있다.

1998년부터 춘계 학술 발표회는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해 왔다. "신약성서의 경제 윤리"(1998), "밀레니움과 신약성서의 종말론"(1999), "새로운 세계 안에서의 교회의 자리 찾기"(2000), "신약성서의 화해 신학"(2001) 등,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부합하는 주제를 선정하여 학문적인 연구를 수행하였다. 또한 이 논문들을 하나로 묶어서 하나의 단행본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현재, 신약논단 4권, 5권, 7권은 단행본으로서 서점에서 꾸준히 팔려 나가고 있다.

또 하나 특기할 사항은 1999년 총회에서 "신약연구시리즈"를 편찬하기로 결의하였다는 점이다. 이 시리즈는 신약논단과는 달리, 관심을 같이하는 회원들이 함께 모여 주제를 정하고 연구하여 그 결과물을 하나의 책으로 묶어내는 것이다. 이 시리즈를 내기로 결정한 것은 학회원들의 연구 활동을 촉진시키고 교회 현장에 더 큰 공헌을 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이 연구 프로젝트는 편집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편집위원회의 심사와 자체내의 독회를 거쳐서 출판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매우 양질의 연구 결과를 생산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작품으로서 <누가복음 새로 읽기>(한들)가 발행되었고, 후속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최근 몇 년간의 신약학회의 성장은 눈이 부실 정도다. 일부 회원들은 그 속도를 따라 잡지 못할 정도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고, 새로운 회원들이 급증하고 있다. 새로운 회원들의 학문적 역량도 더욱 강해져, 이제는 국제적인 수준에 이른 지가 오래 되었다. 학자들의 식견이 하도 높아서 논문을 들고 앞에 서기가 겁이 난다고 말할 정도로 아주 훌륭한 발전을 해 왔다.
"본격적인 학술단체로의 도약"(2005-현재)
한국신약학회는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학회지 『신약논단』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등재지로 공인받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임원진들의 헌신적인 수고로, 드디어 2006년 12월에 등재후보지로서 선정되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그 이후로부터 논문 게재율이 높게는 2:1의 경쟁을 보이고 있다. 현재 편집위원회에서는 등재지로서 격상되기 위해 최종적인 심사결과를 남겨두고 있다.
다음으로 2001년부터 시행되던 월례발표를 발전시켜, 2008년부터는 년 2회 주요 학문적 어젠다를 설정하여 좀 더 깊은 토론을 위해서 콜로키움을 운영하고 있다. 이제 2009년 4월에는 드디어 역사적인 100회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신약학회가 더욱 큰 역량으로 한국 교회와 세계 신학계에 크게 공헌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